(속임수) 결론과 유산
오늘날의 탈라브하임
탈라브하임은 인간 제국의 특별한 도시이자 위대한 보루이다. 이 북적거리고 사람 가득한 장소는 거대한 분화구 내부에 건설되었다. 나는 내 여정 동안 여러 번 탈라브하임을 방문하여 자신들의 고향과 도시에 충실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그곳의 국군State army들과 함께 전투에 나서는 기회를 가졌었다.
탈바스톤Taalbaston이라 알려진 분화구 성벽 밖에서부터, 침략군이 도시를 공격하는데 있어 끔찍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은 꽤 명확하다. 분화구의 천연적인 산의 벽은 땅에서부터 높이 솟아있으며 수년간 도시의 방어자들은 정상에 방어용 구조물들을 설치해, 도시로부터 멀리 퍼져있는 방대한 숲은 내려다보는 감시탑들은 슈피레스트라세Spierrestrasse라 알려진, 분화구의 가장자리 전체를 통해 나있는 좁은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도시로 다가오는 누구든 영구히 인원들이 배치된 이러한 요새들을 수마일 밖에서부터 볼 수 있을 것이다.
'채찍질들lashes'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감시탑들은 대포와 노포들을 장비했으며 분화구 벽 안팎으로 명확한 사계를 지녔다. 이런 자연과 인공 방어물들의 혼합은 도시를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고대 숲 길을 지나고 나면 분화구 성벽은 당신 위로 그 그림자를 드리운다, 길Wizard's Way이라고 알려진, 탈바스톤의 가파른 성벽을 오르는 고리형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 도로는 충분한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넓지만 다가오는 어느 군대든 분화구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인 최고 경비 요새의 대포와 총안들 아래에서 진군해야 한다.
만약 어느 병사든 마법사의 길 정상에 살아서 도달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 많은 포좌와 천장에서 끓는 기름을 머리 위로 쏟아내는 구멍들이 있는 네 곳의 쇠창살 문과 수십의 살인호들, 그리고 한 곳의 긴 지하도를 마주한다. 그들이 예기치 못하게 여기까지 온 상황에선, 침략자들은 분화구 내부로 내려가, 도시로 이어진 더 지그재그형의 길을 횡단해야 한다.
도시는 분화구 벽으로 보호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넓고 빠른 상속의 탈라베크 강이 자연적인 성채 북쪽을 휘감고 있어 그쪽 방향에서의 공격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이는 공성전 동안, 방어자들이 서쪽으로 통하는 부두를 차지하고 있는 한 강을 통하여 도시가 보급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탈라브하임의 견고함은 일부 학자들에게 왜 오틸리아가 탈라베크 전투에서 도시를 떠나 슈티어란트에게 진군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든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간단하다: 제위 주장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덜 용감한 지도자는 실로 탈라브하임의 완고한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편히 자리잡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는 제국의 통치권을 얻을 여느 기회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누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막대한 재앙과 슬픔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땅 위에서 만연하는 적들을 상대로 숨는 지도자를 따르겠는가?
오틸리아는 슈티어란트 백작을 야전에서 만나 패배시킴으로서, 그녀가 어디서든 자신의 적들을 패배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않다면 누구도 땅을 통치하지 못한다. 만약 그녀가 탈라브하임에 머물렀다면 패배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유명한 승리를 거머쥐고 제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권을 지켰다.
물론,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상태로 군대를 모으고 정치를 할 수 있으며 또한 만약 전투로 끌어진다면 그녀가 형편없는 미끼를 준다고 적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난공불락의 위치를 제공하는 견고한 요새는 그녀의 계획에 필수적이었다.
결론과 유산. 승리를 거두어, 많은 이들에게서 지지를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틸리아는 여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제국의 끊임없는 사회적인 갈등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이는 우리 역사의 슬픈 사실로, 인간 군대끼리 서로 싸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창병대의 요란한 대열들과 말을 모는 기사들, 펄럭이는 군기들 그리고 울리는 북들이 오크나 북쪽에서 내려온 사악한 적들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의 동료들에게 맞서는 것을 상상해보라!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탈라베크 전투는 제국 내전의 가장 거대한 전투들 중 하나로 미래에 있을 전투들의 기준을 제공했다. 제위를 사이에 둔 경쟁 세력들은 그 결과로부터 자신감을 얻었고, 충분한 용기와 병사가 있다면 누구든 그들의 제위 주장에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은 한 영웅이 밟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곳을 따라갈 것이다,'라고 위대한 역사가 아돌포이스 드라이터Adolpheus Dreiter는 그 시기에 대해 덧붙였다.
황제로써 슈티어란트 백작의 치세는 대실패 이후 단명했다. 그런 나약한 군사 전략가를 지지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동맹들은 그를 저버렸다. 제위는 사실상 비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제위를 주장하는 누구든 그것을 차지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제국의 평야들은 훨씬 더 심해진 경쟁과 군대들간의 충돌로 많은 피를 빨아들였다. 오틸리아의 책략과 기회주의에서 탄생한 탈라베크에서의 승리로 새로운 내전의 시대와 불만을 도래하였다: 이 유명한 전투의 슬픈 유산이었다.